1980년대 후반
아빠는 엄마에게 핀잔을 듣는 일이 종종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매번 엄마 몰래 책을 샀기 때문이다.
책을 사는 게 혼날 일이냐고?
그때는 그랬다.
그 당시는 전집이 유행이어서
책을 샀다 하면 무겁고 큰 책들이
금세 수십 권씩 집에 쌓이곤 했다.
굳이 엄마 편을 들자면
박봉 공무원에 애가 셋에 집도 좁은데
관심 1도 없는 책이 수십 권씩 늘어가는 상황이
달갑지 만은 않았을 것 같다.
하지만
그 시절 내 벗이 되어 준 건 다름 아닌
엄마가 그토록 치워버리고 싶어 하던 책들이었다.
아빠가 사 모으던 쓸데없는 전집들이
나의 유일한 장난감이자 세상을 보는 창이 되어주었던 것이다.
나는 친구와의 사귐이 어려워서
집에서 혼자 시간을 보내는 일이 많았다.
딱히 가지고 놀 장난감도 없었기 때문에
글을 몰랐을 때는
책을 쌓아 집을 만드는 놀이를 많이 했던 것 같다.
그러다가 크고 무거운 사진 전집에 푹 빠져
사진을 통해 세상을 보고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유년기를 보냈다.
지금은 헌책방에나 있을 법한 열 권이 넘는 거대한 사진집은
세계 곳곳의 사람들과 풍경으로 그득했고
나는 사진 속의 세상을 매우 동경했다.
'안녕? 나는 awn이라고 해.'
사진집 속 세상은 정말 어마어마했다.
움직이지 않지만 힘이 있었고 마치 내가 가야 할 곳인 듯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정적인 것 그 자체가 나의 상상력을 자극한달까,
그 정적인 것 안에서 무수히 다른 삶과 에너지를 느끼는 것 자체가 황홀했달까.
그리고 또 하나,
정적인 에너지는 내가 컨트롤할 수 있는 만큼 안심감을 안겨주었다.
하지만, 어느덧 시간이 흐르고 흘러
나의 감각도 많이 무뎌져 버렸다.
금방이라도 흩날릴 것 같은 머리칼 하나에도 전율을 느끼던 때가 있었는데 말이다.
이제는 세상을 조금은 알 것 같기에
남이 찍은 사진 말고
과거에 내 똥손으로 찍은 사진들을 보며 무수히 자극을 받고 있는 중이다.
장면 하나하나에는 수많은 사연들과 감정들이 담겨있어,
찍는 순간에 다 알지 못하고 표현하지 못한 것들을 천천히 하나씩 헤아리는 재미가 쏠쏠하다.
사진은
그 어릴적 나에게 아름다운 세상을 보여주었고
지금은 과거에 몰랐던 나를 알게 해주는 고마운 존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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