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오빠는
나보다 나이가 두 살 많고 학년은 3학년 위다.
어려서부터 나는 유독 오빠를 따랐는데,
오빠도 내 손을 꼭 잡고 친구들과 총놀이를 하러 다닐 만큼
나를 많이 아꼈다.
오빠 친구들 사이에서 나는 껌딱지로 유명했고
심지어 오빠 유치원에 따라가서 대문에 매달려
수업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는 진상짓을 자주 했다.
오빠가 당시 6살이면 난 4살에 불과했을텐데도
그때의 기억과 감정이 매우 생생하다.
오빠 손을 잡고 들어갈 때 안쓰러운 눈망울을 하시며 날 바라 보던 유치원선생님 ㅠㅠ (얄미웠을지도)나랑 이름이 같던 오빠의 첫사랑 (얄미웠을지도)아무튼 이러한 우애는 참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우리 가족은 오빠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해에
깡촌에서 시내로 이사를 하였다.
오빠가 초등학교에 입학을 했었어도
나의 껌딱지 활동은 계속되었다.
왜냐하면, 아빠가 그 학교에 재직 중이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세상이 바뀌어서 꿈도 못 꿀 일이지만,
30여 년 전만 해도 교사는 박봉이지지만서도
여러모로? 매우 좋은 직업이었다.
내 나이가 그 당시 다섯 살이어서
유아원에 가기도 어린 나이라,
가끔 나는 아빠가 출근할 때 같이 학교에 가기도 했는데,
학교 교사들이 거의 우리집에 놀러 오는 삼촌들이었기 깨문에 개꿀 오빠가 공부하는 교실 구석에 나무 의자를 놓아 주시곤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오빠는 어린 나이에 참 대단했던 것 같다. 귀찮을 법도 하고 창피했을 법도 한데 말이다.
일곱 살이면 친구들이랑 운동장을 뛰어다니면서
잡기 놀이도 하고 공도 굴리고 할 나이 아닌가?
보통 나 같은 캐스퍼를 달고 다니면 놀림의 대상도 되고 친구들한테 궂은소리도 들었을 텐데,
단 한번도 오빠가 나 때문에 화를 내거나 슬퍼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친구들이 천사 ㅡㅡ?..
나는 굉장히 내성적이고
사회성이 부족한 아이임이 분명했다.
친구가 있었지만, 친구들과 어울리는 법을 잘 몰랐다. 친구들과 놀면 내가 많은 반응을 해야 뭔가 교류가 이루어질 텐데 나에게는 그런 힘이 부족했다.
하지만, 오빠는 남과 달랐다.
오빠는 말하지 않아도 내가 원하는 것을 알고 있었고 기꺼이 나를 위해 희생하였고 보살펴주었다.
오빠와 같이 있을 때면 마치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는 그런 느낌이었다.
여하튼 결국 나의 진상짓도
나의 초등학교 입학과 더불어 막을 내리게 되었다. 나에게는 역경과 고난의 시작이 되는 시기라고도 할 수 있겠다. 왜냐하면 그 이후로는 그다지 행복한 기억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오빠는 그 이후로도 나에게는 큰 힘이 되었다.
같이 지내는 시간이 줄고 서로 모르는 게 많아졌지만,
청소년기 때는 정기적으로
오빠의 친구들의 잔소리와 산 증언을 통해
오빠의 애정을 많이 느낄 수 있었다.
결혼은 죽어도 안 한다던 오빠가
3년 전에 장가를 들었다.
내 코도 석자인데 오빠 병 수발해야 하나
많은 부담이 있었는데,
어깨의 짐까지 덜어주다니 정말 좋은 오빠이다.
새언니는 오빠의 초등학교 동창인데
그야말로 35년 친구 먹다가 막판에 둘이 결혼을 했다.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나는 새언니를 잘 몰랐지만 새언니는 나의 껌딱지 시절을 잘 알고 있는 듯했다.
새언니는 복댕이다.
이제서야 오빠가
일상의 소소한 행복을 만끽하며 살게 되었으므로.
올해 처음으로
오빠한테서 생일 축하 메시지를 못 받아서잊어버렸나... 헐... 어이없......
무척 당황스러웠지만,
그만큼 오빠가 새언니랑 알콩달콩
자알 산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그래도 이따가 일침을 날려줄 것이다. 흥칫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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